『사랑의 뼈들』(삶창), 『편향의 곧은 나무』(한티재)의 시인 김수상이 지난 22일 ‘제4회 박영근작품상’에 선정됐다. 선정작은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 창립 22주년 축시 「미움은 미워하며 자라고 사랑은 사랑하며 자란다」이다. 시상식은 5월 12일(토) 오후 4시 30분 인천 북구도서관 평생학습실에서 열린다.
염무웅(문학평론가), 고형렬(시인), 정세훈(시인)이 참여한 심사위원단은 “시의 기교가 넘쳐나는 시대에 이를 초월해, 외롭지만 역사의 아픔과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꿋꿋이 시의 미덕과 참다운 도리를 다하고자 고군분투하고 있다”라고 평하고 “근대 개항기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학살, 일제강점기 친일, 군부독재 시대 광주의 5월까지 우리가 어설프게 유폐시킨 역사를 꼼꼼히 호명해 현재, 더 나아가 미래에 접목하여 시의 진실한 길로 나아가고 있다” 분석했다.
시인은 수상소감에서 “시인은 아름다움의 반대편의 자리인, 비천하고 추한 자리에서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존재입니다. 아름다움의 안에서는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으니까요. 시인은 삶의 뜨거운 국물을 맨손으로 받아내는 존재입니다. 무언가 받아내려면 내가 낮은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낮은 자리, 바닥을 향하는 자리가 시의 자리일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니 제 삶의 그래프가 조금은 미더워집니다. 시를 쓰는 일은 시인이 사는 동안 감당해야 할 형벌입니다. 산양은 천길 벼랑에 뿔을 걸고 잠을 잔다고 합니다. 그런 자세로 시인의 길을 걸어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김수상 시인(대구경북작가회의 사무국장) |
미움은 미워하며 자라고 사랑은 사랑하며 자란다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 창립 22주년에 부쳐
김수상
일본군이 동학 농민군을 죽일 때
농민군의 사지를 소나무에 묶어놓고
묶인 사람의 정수리에
송진을 바른 소나무 가지를 뾰족하게 깎아
망치로 박아 넣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불을 붙이는데,
정수리에 박힌 나무못에 불이 붙으면
팡, 팡, 팡!
농민군들 머리 터지는 소리가
10리 밖에서도 들렸다고 한다
어디 동학군뿐이겠나
대구의 10월
제주의 4.3
광주의 5월
총으로 쏴 죽이고
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죽인 나라에
아직 우리가 살고 있다
일제에 빌붙고 군부와 독재에 아첨하며
온갖 영화를 누린 사람들은
아직까지 권력의 단맛에 취해
대대손손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살고 있는데
빛바랜 창호지 같은 얼굴을 한 우리들은
창천(蒼天)의 하늘 아래 별로 부끄러움이 없다
외국인 200만 명이 우리 땅에 살고 있다
같은 말을 쓰면서 일정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 같이 살아온 사람들을 민족이라 부른다
그게 민족이라면 그런 시절은 이제 곧 지나가지 않겠는가
우리가 우리를 무참하게 학살하고 때려죽인 이유가
아직도 명백히 밝혀지지 않았다
같은 민족에게 총칼을 겨눈 반역의 죄인들이
광장의 맑은 햇빛 아래 끌려나오지 않았다
인간은 어디까지 선할 수 있고
인간은 어디까지 악할 수 있는가
사람이 죽으면 혼백(魂魄)이 되는데
혼백은 혼(魂)과 백(魄)으로 나누어진다
혼(魂)은 몸을 빠져나와
위패 안에서 살다가 하늘로 올라가고
백(魄)은 사람의 몸에 남아 흙이 되고 바람이 된다
억울한 영혼은 백(魄)이 되어 눈을 뜬 채 땅에 머문다
내가 왜 죽임을 당했는지
내 무덤을 내가 파서 왜 생매장을 당해야 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상생(相生)이 먼저가 아니고
해원(解寃)이 먼저다
원한을 풀어야 같이 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민족은 해묵은 낱말이 아니다
민족은 폐기되어야 할 말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저지른 참혹한 죄가
가을밤의 별처럼 자꾸 돋아나는 한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자꾸 되돌아봐야 한다
어머니가 동구 밖에서 우리를 보낸 뒤에도
우리가 사라질 때까지 우리를 지켜보듯이
우리는 우리에게 저지른 죄를
무릎 꿇고 고백해야 한다
영원한 이념은 없고
영원한 민족도 없어라
세상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모든 사람은 같은 민족이어라
세상의 그늘 안으로
맑은 햇볕 한 줌 쥐고 달려오는 사람은 모두가 같은 민족이어라
선하고 맑은 마음만이 인간의 역사 앞에 오래 살아남아
별처럼 빛날 것이다
민족은 세상의 아픔을 함께 하는 사람들
민족은 세상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 사람들
민족은 세상의 불의에 항쟁하는 사람들
민족은 진실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들
민족은 핏줄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
사랑으로 사랑하면 기쁘지 아니한가
우리는 사랑공화국에서 법도 없이 푸른 맥박으로 사는
사랑의 사람들이다
미움은 가고 사랑은 오라!
거짓은 가고 진실이여 오라!
2015년 11월 19일, 김수상 시인은 그의 시 ‘슬픔이여 단결하라’를 뉴스민에 기고하더니, 그해 12월 4일 달서평화합창단으로 ‘세월호 참사 600일 대구시민 기억과 다짐의 날’ 무대에 올라 그 시를 낭송했다. 합창단이 ‘화인’을 연주하는 중 노래가 멈추고, 시인은 직접 그 시를 읽었다.
“눈물이 모이면 이제 겁나는 것이 하나도 없겠다
눈물 때문에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될 우리는
두려움도 버리고 상처도 버리고
마침내 육신마저 벗어버릴 것이다
반짝이는 눈물만 데리고 우리는 슬픔의 나라로 갈 것이다“ - 김수상 ‘슬픔이여 단결하라’ 가운데
이후 시인은 성주 사드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현실과 밀착된 시를 이어갔다. 2016년에 발표한 시를 보면 7월 ‘너희는 레이더 앞에서 참외나 깎아라, 우리는 싸울 테니’를 시작으로 연이어 ‘똑똑히 보아라, 우리가 바로 평화다’ ‘길을 막고 물어보자’ ‘저 아가리에 평화를!’ ‘차벽이 꽃벽이다’ ‘니들이 이 맛을 아느냐?’ ‘이곳은 평화를 촬영하는 드라마 세트장이다’ 같은 시들을 발표했다. 2017년에도 ‘다시, 머리띠를 묶으며’ ‘소성리의 봄-3월 18일, 소성리 평화발걸음을 다녀와서’를 3월에, ‘꽃들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항쟁하는 사랑기계들이다’를 4월에 발표했다. 이어 ‘우리가 사랑이다? 성주촛불 300일에 부쳐’ ‘우리가 맞고 너희는 틀리다’ ‘성주촛불, 니 이럴 줄 알았다’까지 현실 문제를 외면하지 않았다.
‘박영근시인기념사업회’는 2006년 5월 작고한 박영근 시인을 기리는 모임으로 2015년부터 해마다 ‘박영근작품상’을 선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상금은 200만 원, 전년도 발표작 가운데 뽑는다. 앞선 수상작가로는 문동만 시인(제1회 수상자, 「소금 속에 눕히며」), 박승민 시인(제2회 수상자, 「살아 있는 구간」), 성윤석 시인(제3회 수상자, 「셋방 있음」)이 있다.
박영근 시인은 1958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1981년 『반시反詩』 6집에 「수유리에서」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했다. 1984년 첫 시집 『취업 공고판 앞에서』, 산문집 『공장 옥상에 올라』 출간하했다. 이어 두 번째 시집 『대열』, 세 번째 시집 『김미순전』, 네 번째 시집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 다섯 번째 시집 『저 꽃이 불편하다』, 시평집 『오늘, 나는 시의 숲길을 걷는다』 출간했다. 1994년 제12회 신동엽창작기금을, 2003년 제5회 백석문학상을 받았다. 2006년 결핵성 뇌수막염으로 타계했으며, 유고시집『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가 2007년에 출간됐다.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민중문화운동연합,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 등에서 활동했으며, 『예감』 『내일을 여는 작가』 『시평詩評』 등 잡지의 편집위원과 민족문학작가회의 인천지회 부회장, 인천민예총 부회장,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등을 지냈다. 오랫동안 부평에서 살았으며, 시인이 자주 거닐던 부평구청 옆 신트리공원에 그의 시비가 2015년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