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한 예술은 정말 가능할까? 사실 이 질문을 받았을 때, 너무나 익숙한 질문이라서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하나?’라는 생각도 가졌다. 그렇지만 모든 발전은 질문에서 시작하고, 그 질문은 궁금함에서 시작하고, 그 궁금함은 답답함에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예술에 대해서 답답해할까? 다시금 돌아 돌아서 이 질문에 도달한다. 그러나 단순한 이 질문을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다시금 질문하자면, ‘우리는 예술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먼저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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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바레티스트 김주권 테너 |
사실 우리는 예술이 뭔지도 모르면서 던지는 질문들이 너무 많다.
나만의 경우가 아니라 다수의 예술전공자 가운데서 전업 예술가로 활동하는 사람 중에 예술이 뭔가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은 경우는 역사적으로도 없다.
그저 예술이 뭔가에 대한 질문만 무성하다. 그래서 위의 제목처럼 ‘모두를 위한 예술은 정말 가능할까?’에서 우리 모두는 ‘예술이 뭔지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먼저 던져야 그나마 최소한의 이해의 폭을 좁힐 것 같다.
예술에 대한 최초의 그나마 신빙성 있는 논쟁은 플라톤의 ‘국가-정체’에서 처음 대두된다. 여기에서 소크라테스는 선의 관점에서 아르테Arte와 테크네Techne를 구분한다. 물론 이 구분이 나중에 칸트의 ‘판단력 비판’까지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다.
다시 돌아가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문답법으로 여러 상대에게 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질문을 한다. 이 ‘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바로 ‘예술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한 부분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선’이란 ‘덕’이라고도 불렀다. 그리고 그 덕이 현실에 드러나는 부분을 예술이라고 부르면 적당할 것 같다.
이정도면 예술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된 것 같고, 이제 모두란 말로 들어 가보자.
모두란 말은 무슨 의미일까? 모두란 말은 그리스어로 올로스?λο?와 카테κ?θε로 나뉘어진다. 올로스는 그냥 전체를 뜻하고, 카테는 구별된 집단의 전체를 뜻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카테고리는 그리스어 그 집단 전체를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논의해야 할, 아니 고민해야 할 이 ‘모두를 위한’이라는 말은, 적게는 지구인 전체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크게는 우주에 존재하는 생명체 모두를 이야기하는 것인지에 구분이 필요하다.
이 구분에 맞추어 이야기하자면 대단한 척 크게 생각하지 말고 작게 생각해서 내가 사는 마을과 구 그리고 도시를 중심으로 나누어져야 논의가 가능할 것 같다. 이렇게 구역을 그리고 계층을 나누지 않고 모두란 말을 사용한다면, 논의 자체가 불가능한 너무도 장황한 말이 될 것 같다. 이러한 이유로 ‘모두를 위한’이라는 이 제목마저도 먼저 구분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모두’는 어떤 사람들일까?
기본적으로 작게 생각해서 내가 살고 있는 대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각 구로 구분을 짓고 그 구 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교육 정도와 교양 정도를 측정해야 하고, 교육은 인문과학인지 자연과학인지를 구분해야 하고, 그 가운데 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 교육이 지식의 전달과 발전에만 맞추어져 있는지, 아니면 교양에도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분류도필요하다. 만약 교양이 없이 지식의 전달과 발전에만 맞추어져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예술과는 좀 동떨어진 교육이 아닐까? 이점에 대해서 서양의 철학자 중에 르네 데카르트는 이런 교
양을 갖춘 감각을 봉 상스Bon Sens라고 즉 좋은 감각이라고 말했고, 영어권에서는 이것을 상식 즉 커먼센스Common Sense라는 공통감각으로 부른다. 그리고 이 공통감각은 내적 감각, 사회적 감각, 연대성 감각, 공동 정신이라고도 불리는 모든 감관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감각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당연하게 이 공통감각 즉 상식은 데카르트가 말한 것처럼 철학의 가장 기초가 된다. 이 철학의 기초인 공통감각은 철학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감각의 표현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예술이다.
그래서 예술은 인간의 생활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상식의 근간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돌아가서 우리들의 질문인 ‘모두를 위한 예술은 정말 가능할까?’라는 질문에 다시금 질문을 던져본다. 소크라테스가 이야기 한 삶의 기술들 즉 덕성을 갖춘 아르테와 단순 기술인 테크네에서 예술은 어느 곳에 속한 것일까? 개인적 연구에 기초하자면, 예술은 테크네에서 시작해서 아르테로 나아가는 즉 단순 기술에서 덕성을 겸비한 기술로 나아가는 길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를 위한 예술을 위해서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
우선 예술의 각 부분 중에서 자신의 특성을 드러낼 수 있는 영역을 찾고, 이 영역에서 자신의 기술을 연마하는 가운데 즐거움과 수양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 그 결과물로 나오는 것 즉 이 결과물이 모두를 위한 예술로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이 모든 경위를 설명하자면, 예술 유전자설이 먼저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 예술 유전자설은 본 필자가 예술을 설명하기 위해서 유전학을 가지고 나온 이야기라서 생소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팔자라는 이야기보다는 좀 더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라서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겠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인간은 자신의 발전을 통해서 사회적 모두를 향해 나아간다. 이 과정이 모두를 위한 예술의 과정이고, 이 과정의 결과가 모두를 위한 예술의 밑거름이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모두를 위한 예술은 존재할 수 있다. 물론 그 예술이 지금 우리의 현실에 얼마만큼 속해있고 드러나는가는 또 다른 질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를 위한 예술을 위한 준비과정인 봉-상스Bon Sens 즉 상식을 위해서 먼저 기술을 익히고 발전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오늘이 늦었다면 내일부터 자신의 취향에 맞는 예술의 기술을 익혀 나가자! [기고 김주권 카바레티스트 ] 문화예술리뷰잡지 사각 2018년 3.4월호에 실린 기획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