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한 예술이 가능한가?’ 라는 질문을 곰곰이 생각하다보니 질문이 어렵기도하고 또 어떻게 보면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질문인 것 같기도 하다. 불과 20여 년 전인 20세기적인 시각으로 보면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질문일 것 같은데 21세기적인 가치관과 패러다임으로 바라보면 가능 할 것 같은 질문이기도 하다.
필자는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으며 그 보다 한 세기 앞섰던 톨스토이의 ‘예술론’을 읽으며 나름대로의 예술관을 가지려고 노력했었다. 19세기 대 문호가 쓴 ‘예술론’을 읽고 예술관을 정립한 20세기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21세기의 질문에 그 해답을 찾으려고 하니 꽤 복잡하고 어렵다. 이렇게 쓰고 보니 마치 필자가 수백 년을 살아 온 사람처럼 느껴질 수도 있으나 21세기가 시작된 지난 18년 동안 우리 인류는 그 전의 수 세기 동안 쌓아왔던 기술과 문화와 지식들보다 훨씬 더 많은 성장과 발전 그리고 변화를 이루어 왔기 때문에 불과 20여 년 전의 20세기가 마치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말이다. 19세기 예술 시장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을 것이란 추론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당시는 사회 지배계층들의 쾌락의 도구로 또 그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것이 예술이었지 않은가? 20세기에도 여전히 모든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예술 장르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20세기 말에 등장한 ‘대중예술’이란 단어로 인해 이전에는 감히 예술 혹은 예술가라고 불리기 어려웠던 부분들에도 이제는 서슴없이 예술 혹은 예술가로 부르고 있지 않는가? 나아가서 스포츠계에도 기량이 뛰어난 선수들에게 ‘예술이다’ 혹은 ‘예술적이다.’라고 표현하고 몇몇 스포츠에는 아예 예술점수가 채점의 한 요소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이렇게 예술에 대한 정의와 가치관이 변화했기 때문에 모두를 위한 예술은 가능 하리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렇다면 모든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또 공연장에서 대중적인 측면에만 치중하는 모습들이 과연 옳은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글의 최초 질문이 바라는 답 또한 ‘모두를 위한 예술은 대중예술이다.’는 아닐 것이다. 적어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술이라고 인식하는 20세기적인 예술의 틀 안에서 모두를 위한 예술을 고민하는 질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자 그럼 답을 한 번 찾아보자. 일단 창작 활동을 하고 있는 모든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주목 받고 사랑 받기를 원하고 또 그렇게 되기 위해 엄청난 고민과 노력을 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의 처절한 노력에 또 다른 주문을 추가 하는 것은 바로 앞서 언급했던 ‘대중 예술이 답이다.’로 귀결 되어지는 참담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촉망 받던 젊은 예술가들이 대중화와 산업화의 시류에 휩쓸려 오직 생존하기 위해 자신이 추구하던 예술 장르를 버리고 현실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제는 더 이상 예술가들에게 돈 되는 예술을 요구하지 말고 다른 유명한 아티스트처럼 해 달라고 흉내 내기를 주문하지 말자. 모두를 위한 예술을 찾기 위해서는 진정한 예술혼을 불태우는 예술가가 먼저 존재해야 하지 않겠는가?
예술가들이 예술을 버리고 대중과 타협하는데 어떻게 모두를 위한 예술이 생겨나겠는가? 생산자에게 현 시장의 트렌드만 요구하면 새로운 트렌드는 누가 만들어 내나? 예술가는 새로운 가능성과 트렌드를 제시하고 만들어 내는 선구자이지 흉내 내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대중들이 스스로 찾아오게 만드는 예술을 만들어라? 예를 들어 미국에서 수입된 고양이를 사랑하자는 뮤지컬은 극장에 올리기만 하면 흥행이 담보되기 때문에 대한민국 모든 공연장에 못 올려서 안달이다. 공연업계 관계자들은 검증되었다고 표현하지만 다르게 얘기하면 엄청나게 광고비를 쏟아 부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고양이를 사랑하자는 그 뮤지컬을 보고 나면 사람이 갑자기 선해지고 힐링이 되나? 보는 동안 즐거웠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어떤 예술이라도 그 만큼의 투자와 세뇌 수준의 홍보가 뒤따라 준다면 무조건 성공한다고 본다. 그리고 클래식 음악은 지루하고 어렵다? 현재 한국의 지상파 정규 방송 프라임 타임에 편성된 클래식 음악 방송이 존재 하는가? 대중들이 싫어해서 편성하지 않는다? 클래식 음악이 정서에 좋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아이러니 하게도 힐링을 갈망하고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현 시대에 티비를 켜면 온통 반라로 춤추는 걸 그룹들이 출연하는 K-POP 방송과 특이한 먹거리와 특별하게 먹는 사람들이 출연하는 먹는 방송이 대부분이다.
대중들의 정서를 위한 진정한 힐링과 건강한 삶을 선도하기 위해서 방송이 존재한다면 프라임 타임에 클래식 방송을 못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진정 모두를 위한 예술을 찾는다면 예술가에게 트렌드를 요구하지 말고 그들이 자신들의 예술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주어야 하지 않을까? 혹자는 이미 많은 예산이 예술계에 투입되고 있다고 얘기 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 예산이 정말 투명하게 쓰이고 있을까? 모든 예술가들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는데 써지고 있을까? 어떤 예술가는 당장의 생활고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또 다른 예술가는 연봉을 수십억씩 받는 세상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사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데올로기의 합리화인가?
평창 올림픽 기간 동안 가장 유명해진 이들은 여자 컬링 선수들일이다. 어떤 이는 자기 자녀를 컬링 선수로 키우고 싶은 이유로 긴 시간 동안의 방송 노출이라고 한다. 10엔드까지 두 시간 이상 집중적인 카메라 노출이 스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예술인들은 왜 긴 시간 방송에 출연하지 못할까? 주로 방송에 나오는 이들은 이미 유명해 있거나 그 주변에서 기회를 부여받은 소수의 기득권자들뿐이지 않은가?
긴 글을 맺어보려한다. 모두를 위한 예술은 존재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두가 좋아 한다고 해서 그 예술이 반드시 훌륭하다거나 선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모두를 위한 예술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 예술을 즐기는 사람들의 관심과 인정이 탄생시키는 것이다. 예술은 존재하는 자체가 아름다운 일이고 나아가 예술을 행하는 모든 이들이 공평한 기회를 가지고 선한 예술 활동을 통해 건실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래본다. [기고 손봉준 지휘자 바이올리니스트 ]
문화예술리뷰잡지 사각 2018년 3.4월호에 실린 기획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