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획은 예술인의 과거부터 현재까지 작업과 예술 활동을 수집, 기록하고 이를 공유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움베르코 에코는 저서에서 “아프리카 마을에서는 노인이 돌아가시면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고들 생각한다”라는 말을 했는데 세상이 디지털화 될수록 예를 들어 ‘아카이브’도, ‘빅데이터’라는 것도 사람들의 손이 필요하고 노력이 필요하다. 알파고도 이세돌의 대국을 기억해 데이터화 하듯이 말이다. 우리도 지역에서 오랫동안 활발한 활동을 해 왔던 예술인의 흔적들을 모아모아 데이터화 할 생각이다. 지루한 작업이며 오래 걸리는 일이지만 누군가 해야할 일 것이다.
이 기획시리즈가 지역 예술인의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기회 뿐 아니라 지역예술의 뿌리를 만드는 바탕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늦은 가을 일요일 오후, 석재서병오기념사업회장 장하석, 대구수성아트피아관장 김형국, 학강미술관장 김진혁, 그리고 근원(近園)김양동 선생이 대구 KBS 인근 찻집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
나의 유년은 가난, 당시는 모두가 그랬다
아버지 고향이 경북 의성이라 내 출생지도 그렇지만 내가 태어난 곳은 일본이었다. 세 살에 아버지의 고향에 왔지만 그 사이 아버지 형제가 모아둔 재산을 써버렸다고…. 아무튼 가난했다. 초등학교 때 6.25한국전쟁이 일어났고,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내 유년은, 어쨌든 가난했다. 시골에서 가난은 인생에서 손해라고 생각했다. 청소년기에 독서의 갈증이 심해도 책이 없었다. 어떻게 책을 하나 보면 거의 외울 정도로 읽었다. 내 인생에서 첫 책은 ‘백범 일지’, 첫 장편소설은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이다.
특히 ‘백범일지’에서 애국심, 민족, 사상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운현궁의 봄’은 스토리가 너무 재미있어서 거의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궁핍의 시대, 독서의 갈증을 채우지 못한 채 나는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리고 대학에 가서는 도서대출증을 세 번이나 갈아치우면서, 도서관 책을 모조리 읽을 욕심으로 독서를 했다.
자기결핍증, 내면의 궁핍 때문에 열등의식에 젖어 있었다
여전히 나는 가난했다. 좀 더 나은 환경에 살기 위해서는 학교 졸업장이 필요했다. 졸업장과 청구대에 다니면 면서기라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영신고등학교 야간부 2학년에 들어갔다. 거기서 나는 요즘 유명한 김진홍 목사를 만났다. 당시 그는 성광고등학교 다니다가 학비를 내지 못해 영신고등학교로 왔다가 졸업은 다시 성광고등학교에서 했다. 나보다 두 살 위인데, 모든 지식, 태도, 사고의 깊이 등등이 나와는 비교가 안 되고 심지어 선생님들 보다 뛰어 났다. 그 친구는 나에게 영향을 못 미쳤다고 하겠지만, 나는 어마어마한 영향을 받았다. 62학번인 나는 당시 처음 시행이 된 국가시험을 치러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 영천 삼동농고 교사생활을 1년 반 하다가 서울 공립학교 채용 고시를 통해 서울로 갔다. 그것이 인생의 전환기였다.
철농(鐵農) 이기우 선생을 통해 서예를 만나다
1970년에 철농 이기우 선생을 찾아갔다. 당시는 전각가가 되겠다가 아니라 학교장이 목표였다. 교장실에서 서도를 즐기면 고상하게 살겠다는 아마추어 생각으로 배웠다. 그게 심화되면서 전공이 바뀐 것이다. 80년대 중반에 문예진흥원에서 발간하는 문예연감에는 각 분야 한해의 평문을 쓰는데 서예 분야에 글을 써달라고 요청이 왔다. 집필능력이 없다고 생각해 사양했다. 일중 김충현, 지운 예용해 등 원로들에게 김양동이라는 새로운 인식을 주고 싶은 생각에 당시 내 능력이 되는 대로 썼다. 후에 일중 선생의 칭찬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그 뒤로는 거절했다. 본질적인 공부와 연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대학에 서예과를 만들다
1984년 서예과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유는 국전에 참여하는 예술분야마다 대학과가 있는데 반해 서예는 전공과가 없었다. 미술협회에서도 제대로 대접을 못 받았다. 그래서 대학설립운동 벌이면서 국회에 인문학 기초로서, 서예의 학문적 예술적 발전을 위한다는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했고, 교육부에서는 신청하는 학교가 있으면 허가해주겠다고 했다. 1989년 원광대학교에 서예과가 처음으로 생겨서 남정 최정균 선생이, 그 다음해에 내가 교수로 갔다. 그 뒤에 계명대, 대전대, 경기대 등 전국 5군데 대학교에 서예과가 생겼다. 지금은 서예과가 다 없어졌다. 계명대학교도 내가 정년하고 3년 뒤 폐과되었다.
1996년 첫 개인전을 열었다
철농 이기우 선생에게 배운 지 26년, 내 나이 27살에 시작해서 53살에 작품 53점을 가지고 서울 공평아트센터에서 첫 개인전을 했다.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서예전으로 예상되는 전시는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제대로 형상화 하지는 못했지만 많은 노력을 했다. IMF전 냉랭한 화랑가 분위기이지만, 음력설에 인사동에서 유일하게 전시를 하고 있던 첫 개인전은 많은 관람객과 함께 언론에 관심을 받았다, 그리고 완판 했다. 되돌아보면 참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서예의 조형의지, 현대 미감에 부족하기 때문에 다른 예술보다 외면 받는다
서예는 동양예술의 기초이면서 근본적 획이다. 고전스타일에 매어 놓지 말고, 비록 그것이 서툴지라도 재해석하는 무엇을 보여줘야 한다. 서예가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영고성쇠’를 느낀다. 그러나 지금은 기울지만 언젠가는 찰 것이다. 그럼 왜 그럼 기우느냐에 대한 답은 시대의 문화적 미감 차이다. 시대문화는 유행이다. 한 순배 바뀌는 시기다. 컴퓨터 때문에 붓을 던지고 붓을 던지니 인문학 위기가 왔고 인문학의 위기는 붓의 예술을 경시하고 멀리하게 한다. 영어 때문에 한문이 죽었다. 한문시대가 사라졌다. 그렇지만, 기울 뿐이지 사라지지 않는다.
석재 선생의 가치가 무엇이냐를 정확히 짚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가치의 계승, 그것을 고민해야 된다. 추사의 가치는 추사체의 모방이 아니라 그것을 계승 발전시켜야 가치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다. 석재 서병오 선생의 가치는 새로운 조형보다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제대로 된 가치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2008년 정년퇴임 이후 계명대학교 석좌교수로 있었다. 2013년부터 1년 반 동안 ‘한국고대문화에 대한 원형과 상징과 해석’이라는 원고를 교수신문에 격주로 게재했다. 90년 초부터 연구 집필해온 원고였는데, 다시 그것을 보완정리해서 2015년 ‘한국고대문화에 대한 원형과 상징과 해석’이란 제목으로 지식산업사에서 출판했다. 지금 그 후속작업을 다시하고 있다.
석재문화상 수상 후 준비하는 전시는 빛살무늬가 작품전반에 반영된 작품으로 획의 기원에서 서예정신을 찾고자 한다. 그것이 붓을 통한 획이든 칼을 통한 획이든, 종이 또는 돌에 나타난 획이든 획을 한국미의 본질로 보고 작품 속에 투영하고자 작품을 준비했다.

- 사진왼쪽부터)석재서병오기념사업회장 장하석, 근원(近園)김양동 선생,
- 학강미술관장 김진혁, 대구수성아트피아관장 김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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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2월 12일 부터 대구문화예술회관 전시실에서 2017년 석재서병오문화상을 수상한 근원 김양동 초대전을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