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작품이 예술가에 의해 창조되듯 한 예술가는 그 시대의 아들이다. 6.25전쟁의 참담과 시향의 쓰라린 경험은 그의 예술에 절실하고도 필연적인 변모를 가져왔다. 낯선 대구지방에서의 삶의 뿌리를 내린지 57년, 고독과 슬픔과 향수로 깊어진 상흔을 교육과 예술로 승화시킨 한 인간의 고뇌와 평화에의 갈구가 작품세계의 주제를 이루고 있다. 그는 전쟁 중 공군종군화가단, 월남화가단 창단에 참여함으로써 전쟁의 종말과 잃었던 고향인 봉산(鳳山)을 보고자 했으며 구상전, 이상회전의 회원으로 활약하며 원로작가로서 오늘도 창작의 활화산은 힘찬 불길을 뿜어 올리고 있다. -중략- (2007, 수성아트피아기획 신석필 회고전, 권원순 미술평론가 글 인용)
어린 시절 이야기
1921년생인 나는 대구에 온 지 70년 가까이 되었다. 고향은 황해도 사리원이다. 소학교 2학년부터 그림을 그렸다. 일본서 공부하고 온 백원주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당시 내가 다닌 학교는 일본인 선생과 한국인 선생이 같이 근무했다. 한 가지 기억나는 것은 하늘에 일본전투기가 날아가면 머리를 숙이라고 하는데, 선생님은 오히려 모두 하늘을 바라보라고 하셨다. 당시 백원주 미술선생은 내가 가진 그림 소질을 인정하고 가르쳐 준 첫 선생이었다. 일 년 내내 야외스케치를 나가서 풍경 등을 그렸는데, 그때 나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너무 좋았다.
청년시절
20대에 해주미술학교에 다녔다. 한국에서 제일 먼저 생긴 예술학교로 기억한다. 각처에서 선생들이 왔다. 황해도립해주미술학교를 졸업한 나는 국립평양예술대학원을 진학하려고 했다. 하지만 설립도 늦어지고 이래저래 임용을 기다리는 중에 6.25가 일어났다.
나는 겁이 많은 사람이다. 1.4후퇴 때 가족들과 한달음에 부산까지 내려왔다. 일주일 정도 피신한다고 생각하고 연필, 스케치북, 도시락만 챙겨왔다. 일주일이 일곱 달이 되고 어느덧 7년…, 그사이에 나는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안정된 직장 없이 버티다가 결국 돌아가지 못하고 중고등학교 강사로 생계를 유지했다. 60년 넘게 대구에 있게 된 것이다.
당시 대구는
1951년에 부산에서 대구로 올라왔다. 당시 대구는 시내버스가 10여 대 정도 있었고, 예술인들은 향촌동 주위에 주로 모였다. 생각해보니, 나는 정점식, 주경, 강우문, 서석규, 서동진 등과 어울렸다. 그리고 나처럼 대구로 피란 온 예술인들이 12명 정도 있었다.
피란 온 12명은 월남화가단을 조직했다. 최영림, 윤중식, 이중섭 등과 활동했다. 이인성은 그때 서울로 올라갔다. 월남화가단 7~8명 정도는 혼자 북에서 내려와서 지금의 교동시장 입구에 모여 살았고, 나는 가족들과 같이 지금의 남산동 남문시장에 살았다. 지금도 작업실로 쓰고 있다.
그림만 그리고 싶었다.
처음 대구 서중고등학교에서 2년 정도 강의를 했다. 그리고 왜관 순심중고등학교 2년, 대구 남산여고 15년 교사 생활을 했다. 그리고 영남대학교 여자초급대학미술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영남대학교 4년제 대학이 생겨서 15년, 경북대학교에서 시간강사 10년을 했다. 혹자는 왜 교수를 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당시 국전에 1등을 하면 교수가 될 수 있었다. 난 입선만 네 번 했다. 난 그림만 그리고 싶었다. 크게 욕심이 없었다. 가르치는 안정적인 교수직보다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더 행복했다. 그림을 아침 11시부터 밤 9시까지 늘 그렸는데, 요즘은 하루 5시간 정도밖에 그릴 수 없다.
|
김진혁선생과 신석필선생의 대화 |
꿈을 그리다.
대구에서는 같이 활동해왔던 강우문, 서석규, 장석수 화가들과 친했다. 나는 시도 참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이원수 시인과도 친했다. 이제는 그림만 그린다.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그림말이다. 그래서 그림이 좋다. 나는 어떤 유파와 관계없이 그린다. 예를 들어 꿈은 형상이 없다. 하지만 나는 추상적으로도, 구체적으로도 마음대로 그릴 수 있어 늘 즐겁다. 난 그 꿈을 지금도 그리고 있다.
100세를 앞두고도 열정을 가지고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원로화가 신석필 선생은 오는 10월 11일부터 17일까지 62회 개인전을 예송갤러리에서 가진다. 그의 해맑게 웃는 모습이 소년 같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