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재克哉 정점식鄭點植 탄생 100주년 기념 [위대한 삶과 오래된 공간]
학강미술관 청우헌 고택에 정점식 화백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숭고한 만남의 전시에서, 1955년 대구 미술가협회가 창립전 서문에 그가 적은 시대정신을 나타낸 글귀를 본다.
지금 시대에 새겨도 너무나 놀라운 문장이다. 아! 시대와 아픔의 현실을 앞서 가신 극재 정점식 화백….
그를 처음 알아본 것은 70년대 중반, 새로 생긴 화랑이 있는 대구 중심가였다. 몇 년 뒤 1978년과 1979년 대구현대미술제에 참가하여, 지금의 대구콘서트하우스 자리에 위치하였던 시민회관 전시장 오픈식에 참석한 정점식, 주경 등의 대구지역 저명화가들을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었다. 한국최초의 추상미술 선구자 주경 화백은 나비넥타이에 선글라스 형태의 안경과 핸섬한 모습으로 여유 있는 입담 솜씨가 생각난다. 주경 화백보다 12살 아래의 정점식 교수는 호리호리한 체격에 다소곳이 점잖은 모습으로 후배 작가들의 미술작품에 격려와 덕담을 주기도 하였다. 중앙화단의 앵포르멜 운동이 십여 년이 지난 터라, 새로운 현대미술의 혈기로 충만된 대구지역의 작가들에게는 현대미술의 추상회화에서 극대 정점식 교수를 중심으로 경북미술학원을 운영하던 주경 화백, 수도여자사범대학교를 퇴직한 구상미술의 손이봉 화백 등을 존경하고 있었다.
70년 대 후반에는 정점식 화백이 소속했던 계명대학교 교수작품전과 여러 기획전에서 그를 볼 수 있었다. 작업의 주제는 회색과 흰색이 겹치면서 무언가 애틋한 자기극복의 힘을 전, 선, 면을 통하여 보여주었다. 그때도 여러 젊은 작가들 사이에 그를 존경하는 얘기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80년 대 초반에는 수필집<아트로포스의 가위>라는 저서를 출간하여 작가와 교육자로서 위상과 미술교육연구라는 본질에 충실한 삶을 보았다.
어느 땐가 계명대학교 정점식 교수의 연구실로 방문한 적이 있다. 십여 평의 소박한 연구실에는 많은 서적과 소품을 그리다가만 물감의 흔적이 있었다. 아마 정점식 교수에게 글귀를 부탁드리고자 방문했으나 대신하여 이지휘 교수에게 추천의 글귀를 받은 기억이 난다.
90년 대 이후엔 가끔 여러 전시 오픈행사에서 그를 볼 수 있었다. 작품에서는 서구미술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 어떠한 형상이 동양적 이미지의 선과 면으로 변모되는 과정의 수적(手迹)을 만나게 되었다. 80년대부터 모색한 동아시아의 서체에서 보이는 힘찬 기(氣)와 운(韻)의 캘리그래피적 흔적이, 그의 내부에서 발아된 선과 덩어리로서 정점식 본성의 조형코드로 자리한 것을 감지 할 수 있었다.
그 당시 대구언론에 기고한 칼럼에 대구미술을 개창한 석재 서병오와 그 유파에 대한 문인화를 설명하며, 동양문묵의 흐름과 맥이 자신에게도 자연스럽게 잠재되었다고 얘기한 부분이다. 젊은 시절부터 서구의 추상미술에 경도되어 만들어진 조형언어가, 세월이 흐를수록 한국적 미감의 내적 숨결이라 불리우는 후경의 표층으로 자리 잡은 것이 아닌가 싶다.
|
정점식_하늘_ 1987년작 |
계명대학교를 정년퇴임한 후 많은 후진들이 전시평문의 글귀를 부탁하여 쓴 정점식 화백의 따뜻하고 애정어린 현학의 문장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작가생활 못지않게 평문과 저서를 통하여 지성적인 예술가상을 보여준다. 그는 항상 순수미술과 산업의 연계성을 강조하였다. 미국의 팝아트와 앤디워홀의 아트팩토리처럼 미술디자인의 대중화와 산업화를 얘기하며, 한국과 대구의 현시대에 꼭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제자나 후배들에게 항상 물질의 세속을 따라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벗어난 도인처럼 고립된 작가는 지양해야 된다고 하셨다. 이것은 기본적인 경제여건이 되어야 현대미술가로서의 가치와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96년부터는 대구에도 시립미술관 건립을 위한 간담회와 뒤풀이 자리에서 자주 만나게 되어 그의 평소 철학과 생각을 들을 수 있었고, 앞산 밑 아파트에 차로 모셔다 드리기도 하였다. 식사와 주량에서도 조선선비와 같이 신독(愼獨)의 자기절제와 채찍의 모습을 보였다. 우리 지역뿐 만 아닌 한국의 대표 원로작가로서 몸에 밴 검소와 모범이 일상화된 분이라 느껴졌다. 지방에 거주하면서도 항상 중앙화단과의 관계를 지속하면서 연결의 장을 만들어 나갔고 영남의 원로 추상화가로서의 품격을 간직하고자 하였다.
|
생전 작품앞에서 |
98년에 대구미술협회에서 상신하여 수상한 대한민국문화훈장과 2004년 ‘올해의 작가’로 초대되어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을 기점으로 그는 우리나라 대표 작가로의 위상을 확실하게 자리매김하였다. 그리고 그의 삶에 최고의 절정을 맞았다.
돌이켜보니 그는 1917년 일제강점기 경북 성주의 시골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 대구 남산동에서 선배화가인 서동진, 김용조, 서진달, 이인성 등의 영향으로 화가로의 꿈을 키웠다. 유달리 독서광인 청년 정점식은 프로이트의 <예술론>, 미키 기요시의 <지성론>, 아폴리네르의<큐비즘의 화가들>, 올리비에의 <피카소와 그의 친구들> 등을 탐독하며 작가의 고유성과 예술관을 형성하였다. 강점기 말기인 1941년에는 중국 북만주 하얼빈에 거주하며 또 다른 경험과 기량을 찾았다. 여기서 일본 자유미술가 협회의 창립화가인 쯔다 세이슈 교수를 만나며 새로운 미술과 이론을 나누게 되었다.
해방 후 다시 대구에 온 그는 격변의 시기에 서구의 미술사조에 몰입하였다. 미국문화원 등을 통하여 누구보다 일찍 유럽미술의 상황과 뉴욕을 중심으로 한 미국문화계를 알 수 있었고 파리화단과 뉴욕화단, 러시아 문화 등을 소화하였다. 작업에서도 보다 열린 국제적 보편성의 비정형 언어를 시도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전쟁 시기에 대구의 향촌동은 전국의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서로의 불확실한 인연과 삶의 철학을 주고받는 시절이었다. 여기서 그는 한 살 위의 이중섭과 만나 술잔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중섭은 야수파와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고 온 자존심 강한 일본 유학파의 신성으로, 자신의 긍지와 집념 속에서 현실에 적응하고자 몸부림치던 때였다. 해박한 이중섭은 동년배 정점식과의 만남에서 서로 속 깊은 예술관을 교환하며 한마디 했다고 한다. “나 이중섭은 그림에 천재인데 대구의 정점식은 나보다 더 해박한 천재이다.” 이러한 팩션을 보아도 당시의 젊은 정점식은 인간과 자연, 그리고 사회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사색을 모색한 시기였을 것이다.
이번 정점식의 아카이브에서는 일본의 근현대미술서적·러시아미술서적·유럽과 미국의 50년대 미술전문 서적 등 실로 소중한 자료를 선보이게 된다. 오래된 공간에서 소개되는 그의 평생 수장 자료들은 깊이와 전문성이 있고 다양하다. 이 모든 자료에서 예술이라는 미학이론을 궁구하여 자기혁신과 극복으로 나아가고자한 과정이 보여 진다. 문학에 대한 심취, 동·서양의 미학적 산책, 기독교와 불교의 깊이 있는 깨달음, 나아가 여러 관련예술분야에 대한 접근 등 너무나 광범위하여 열거하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이렇듯 구십여 년의 세월의 궤적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수 백 권의 귀한 자료들을 우연과 필연이 만나 수장하게 되었다. 몇 년 전, 가끔씩 찾는 남문시장 근처의 중고서적을 파는 책방을 지나던 중이었다. 평소 볼 수 없는 일본서적과 영문서적, 그리고 우리나라 대표 문인들의 수필집 등 여러 종류의 서적을 서점 주인이 찢어내고 있었다. 뜯겨진 종이를 보니 ‘정점식 인형에게’라고 희미한 문구가 있는 것이 아닌가. ‘아! 이것이 어찌된 것인가?’ 놀라움에 주인에게 자초지종을 듣자마자, 오늘부터 계속하여 한 달 간 올 테니 앞산 밑 아파트에 사시는 노화가님 에게서 가져온 고물서적을 모두 찾아 나에게 양도하라고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수 백 권의 서적과 잡지들을 다리미로 다리기도 하고 한지를 덧붙여서 장정해 보관하기도 하였다. 언젠가 이 귀한 자료들을 꼭 선보여 극재 화백님의 아호처럼 자기를 초극하여 혁신으로 나아간 개인사를 알려줄 계획이었다. 2016년 가을, 추사 김정희와 석재 서병오로 문을 연 학강미술관이 2017년 초여름, 극재 정점식의 작품과 아카이브로 두 번째 특별전을 개최하는 것이 우연과 필연의 연유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를 위해 계명대학교 미술대학의 협력과 관심에 감사드린다. 또 6월19일 오픈날 열리는 알찬 학술발표도 평소 정점식 교수님을 존경한 서영옥 미술이론가에 의해 이루어진다. 대구의 많은 미술 후학들에게 존경의 대상으로 불리는 우리시대의 추상미술가 극재 정점식 화백에게 무한한 존경의 오마주를 보내고 싶다. -글 학강미술관장 김 진혁 -